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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여행 Travel

[+099일 베트남 하노이] 대한민국 슬픈 역사의 연결고리, 호아 로 수용소 박물관.


하노이 센터 호스텔(Hanoi Centre Hostel)


하노이에서 5박 6일 간 지냈던 '하노이 센터 호스텔' 은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여행객들이 지낼만한 가성비가 괜찮은 호스텔이었다. 


다만, 첫날부터 에어컨이 고장나서 이틀 간 더위 속에서 자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호스텔에서 판매하는 투어상품을 이용하는 숙박객과 그렇지 않은 숙박객에 대한 온도차가 컸으며, 직원 한명은 대놓고 서양인과 동양인을 차별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최근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의 축구 열기로 인해 '한국인에게 우호적' 이라는 이미지가 크게 다가왔던 베트남. 하지만 여행하는 한 달 간, 서양인과 동양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동시에 느낀 나라이기도 했다는 것.. 심지어 같은 '아시아 국가' 에서 말이다.. ㅋ 특히 '호스텔' 같은 숙박업소에서는 그 온도차가 굉장히 크게 느껴져 마음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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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일 베트남 하노이] 생동감이 넘치는 탕롱수상인형극, 활기가 쏟아지는 하노이 주말 야시장.






이틀 연속 훙러우 분짜 하트가 절로 나오는 맛...


오랫만에 인트로가 굉장히 길었다.. ㅋㅋ 물론 베트남을 여행하는 한 달 간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좋은 기억도 많이 남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여행 중 유독 숙박업소에서 트러블이 많았던 나라였던 것도 빼박캔트... 대체 이유가 뭘까..?! ㅋㅋ  


ANYWAY!! 그런 이유로 인종차별 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베트남이 되기를 기도하며 점심으로 분짜를 먹었더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마이쪙..


기승전 분짜 평화.





'흥러우 분짜' 의 화로 안 숯불에서 무자비하게 구워지는 삽겹살과 고기완자.





맛있는 분짜 흡입 후, 후식으로는 근처에 있는 생과일 쥬스 가게에서 망고 스무디 한 잔. 스무디 컵 사이즈가 조금 아담하기는 했지만, 망고 스무디가 한 잔에 1500원이라니.. 이곳은 천국이 분명하다.





 호아 로 수용소 박물관. (Hoa lo prison, Hanoi)


오늘 첫 번째로 방문한 장소는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호아 로 수용소'. 원래 화로(Stove)를 만들어 팔던 길 위에 지어져 호아 로(火爐) 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고 하지만, '지옥 불구덩이' 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호아 로' 가 한국말 '화로' 와 비슷한 이유는?!


옛 부터 중국과 교류를 해온 탓에 '한자' 로 된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한국어와 비슷하게, 베트남어에서도 역시 '한자음' 을 빌려온 단어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호아 로' 는 '火爐(화로)' 의 베트남 식 발음이고, 하노이는 '河内(하내)' '하롱베이' 의 '하롱' 은 下龙(하룡) 의 베트남 발음이다. 


즉, '한자를 기반으로 한 단어' 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호아 로 수용소 박물관 입장료는 30,000동 (한화로 약 1500원)

(운영시간은 오전 8시 부터 오후 4시. 연중 무휴)






호아 로 수용소 박물관의 내부 통로.


1890년대 후반,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군이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건설한 '호아 로 수용소' 는 초기 500~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베트남 독립 투사들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고, 1953년에 들어서는 2000명에 가까운 수감자들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4배에 가까운 인원이 수감된 것이다. 그 결과는 불 보듯이 뻔했다.





한때 '호아 로 수용소' 가 '화로 거리' 였음을 보여주는 전시물들.





가장 큰 수감실 중 하나였던 D번 방. (Cell D, One of largest Cell in Hoa lo prison.)


현재는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는 D번 수감실은 주로 남자들을 가둬 두었던 방으로, 정원이 40명인 방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수용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여름에는 숨이 가쁠 정도로 뜨거운 실내 온도를 버텨내야 했고, 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할 정도로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D번 수감실에 전시되어 있는 수감자들의 복장과 문서들.


수감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제공되는 음식의 질 또한 급격히 낮아졌다. 고기는 힘줄이나, 씹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긴 고기들 뿐이었고, 주식인 쌀은 너무 오래되어 기생충이 득실거렸다. 결국 이런 음식들을 장기간 섭취한 수감자들은 심장에 부종이 생겼고, 심한 경우에는 한 달에 40명 이상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D번 수감실 전시장에 있는 하노이 호아 로 수용소의 축소모형. (파괴되기 전 과거의 모습)





호아로 수용소의 과거 규모 (위) 와, 현재 남아있는 호아 로 수용소 박물관의 크기 (아래).


이렇게 수 많은 베트남 독립투사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호아 로 수용소의 결말은 '개발을 위한 철거' 였다. 1990년대 중반, 호아 로 수용소 대부분의 건물은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하노이 타워' 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남겨진 입구 쪽의 건물만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현재의 '호아 로 수용소 박물관' 으로 전환되었다.   



여기까지가 D번 수감실 전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간략한 호아로 수용소의 역사이다.




호아 로 수용소 E번 수감실 (Cell E, Space for prisoners of war) 의 입구.


D번 방 전시실 다음은, 수감자들의 수용 당시 모습을 재현한 E번 수감실이 나온다. 이곳에 주로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프랑스군에 반하는 정치범들과(1930년대), 베트남 - 프랑스 전쟁의 포로(1946~1954)들이었다. 




긴 평상 위에 발목을 포박당한 채, 움직임을 제한 받는 수감자들의 사진.





하루종일 발목을 포박당한 채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끔찍한 일이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프랑스군의 발상은 '베트남 독립투사들과 전쟁 포로들의 전투 의지를 꺾어 내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상 위에 발목을 포박당한 수감자들의 표정은 어둡게 표현되지 않았다. 감옥 내에서도 베트남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꺾이지 않았음은 물론, 감옥 내에서도 독립투사들의 조직의 결속과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그들의 표정에서 엿볼 수 있었다.





수감소 내의 규칙을 어긴 수감자들이 갇혔던 독방. 

(Cachot area, Dungeon in English.)






일제 강점기 시기,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본군의 민족 말살 정책과 잔혹한 행위들이, 이 곳 베트남 호아 로 수용소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픈 역사를 가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호아 로 수용소를 견학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1951년 12월 24일, 16명의 사형수 중 5명이 하수도 철창을 뚫고 탈출했던 흔적의 보존.





여성 수감자들이 감금되었던 좁은 수감실.





아이가 있는 여성 수감자들이 갇혀 있던 수감실. 


긴 외부 통로를 지나면 나오는 여자 수감실. 이 곳에 감금됐던 많은 여성 수감자들이 제한된 식량과 오염된 물, 더러운 수감실의 환경을 버텨내지 못하고 생을 달리했다고 한다.. 




다른 수감실과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사형수들의 독방. (Death row cells)


좁은 통로를 지나 제일 구석에 있던 좁고 어두운 방들.. 2평도 채 되어보이지 않았던 좁은 독방에는 사형 선고를 받은 수감자들이 갇혀있었다고 한다. 


최소 10개월을 어두운 독방에 갇혀 외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는데, 프랑스군에 위협적인 인물로 판별 될 경우 2~3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프랑스 군이 사형 집행에 사용했던 단두대 (Guillotine, 기요틴)


프랑스군이 사형 집행에 사용했던 '기요틴' 전시실에 들어서자, 다른 사람의 숨 쉬는 소리 조차 들려 올 정도로 공기가 숙연해졌다. 한국 서대문 형무소의 교수대에서 느꼈던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하고 기억해야 하는지는, 베트남의 '호아 로 수용소', 한국의 '서대문 형무소' 와 같은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가장 크게 와 닿는 것 같다.





1954년 꿈 그리던 독립을 이루어낸 베트남에게는 '이념' 의 충돌이라는 더 큰 시련이 남아있었다. 식민지배 시기, 프랑스군이 베트남 독립 투사들을 가두던 호아 로 수용소는 1960년 발발한 베트남 전쟁 중 동족인 '남 베트남 군' 을 가두는 모순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미군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하노이 힐튼(Hanoi Hilton)'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아가 1964년 '통킹만 사건' 을 계기로 참전한 미군 전쟁 포로들을 가두던 수용소의 역할도 했다. 미군 포로들이 지냈던 건물은 일반적인 수용소와 분리되어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적혀있었지만, 나중에 풀려난 미군 포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수용소 안에서 고문과 학대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게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사람들의 '미래' 와 '목숨' 을 앗아갔던 호아 로 수용소가 자리에 남아 교훈을 주고 있듯이, 아픈 역사를 이겨낸 베트남의 미래가 보다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용소 견학을 마쳤다.




거의 설명봇에 가까웠던 이번 포스팅.. ㅋㅋ 베트남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가 많이 닮아 있다보니, 좀 더 감정 이입이 되고 보다 자세히 공부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역사' 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역사를 통해 내 자신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던 먹먹한 기분의 오늘 하루... 습하고 답답한 베트남의 날씨가 내 기분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