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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여행 Travel

[+125일 캄보디아 프놈펜] 반복하지 말아야할 역사의 비극.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


우연하게 만난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어제와는 달리, 하루종일 무기력하면서도 우울함을 떨쳐낼 수 없었던 오늘 하루. 인류 역사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이자, 동족 학살의 현장이었던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에 다녀왔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저렴한 이동수단인 '툭툭' 과 툭툭 드라이버의 모습.


프놈펜 시내에서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까지는 삼륜택시인 툭툭(Tuk Tuk)을 타고 약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자유여행 필수 어플인 '그랩 (Grab)' 으로 툭툭을 호출하면 바가지 요금없이 적당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





 우다야 꽃집 & 식당 (Udaya restaurant)' 의 외부와 내부의 모습.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에 도착해서는 먼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강렬하게 내려쬐는 캄보디아의 햇빛을 버텨내려면 무엇보다 밥심! 체력이 중요하기 때문.





'우다야' 라는 이름의 꽃집 겸 식당에서는 일본식 '미소라멘' 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정통으로 조리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인스턴트 라면에 토핑을 얹어주는 정도의 느낌..?! 그래도 오랫만에 먹는 미소라멘이라 후릅후릅 맛있게 먹었다.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의 입구 (The entrance of Toul sleng genocide museum). 


점심식사를 마치고 도착한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의 입구. 들어가기 전 부터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듯한 공기가 느껴졌다.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은 과거 1975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한 공산당 '크메르 루주' 군이 각 분야의 지식인들과 고위 공직자 등의 가족들을 가두어 놓고,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던 'S-21' 이라는 이름의 극비 시설이었다.

 



과거 수 만명이라는 숫자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은 현재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 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지고 있다.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의 입장료는 성인 $8 (미국달러), 10~18세의 어린이 청소년은 $5 로,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 된 가격이다. 


'오디오 가이드' 를 대여하지 않을 경우에는 $3 달러를 할인 받을 수 있는데, 다음 포스팅에 등장할 킬링필드와 이곳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에서는 반드시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서 돌아볼 것을 추천한다.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의 입장권과 오디오 가이드 교환권.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와 지원되는 언어.


중국을 여행할 당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오디오 가이드에 실망한 기억이 있지만, 프놈펜의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과 청아익 킬링필드의 오디오 가이드의 시스템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유용했다. 무엇보다 지원 되는 10개의 언어 중 한국어가 포함되어 있고, 한국어 해설의 번역 수준도 굉장히 높기 때문에 3달러 이상의 가치를 한다고 확신한다.





오디오 가이드의 이용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위의 사진에 있는 숫자판 앞에서서 해당 번호를 오디오 가이드에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 내부에는 1번 ~ 32번 까지의 번호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단순히 해설 번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역할도 한다. 





먼저 1번 번호판이 세워져 있는 곳 부터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의 견학을 시작했다. 평소같으면 이곳저곳 자세히 사진 촬영을 하면서 블로그에 올릴 사진 자료를 수집했을텐데, 이곳에서는 도무지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특별하게 박물관 내부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저 1번, 2번 3번.. 순서대로 세워져 있는 동그란 번호판을 따라가며 오디오 가이드에서 흘러나오는 해설과 현장의 공기에 집중했다. 영상이 함께 보여지는 것도 아닌데, 마치 비디오가 함께 흘러나오는 것 처럼 당시의 처참했던 현장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무엇보다 억장이 무너졌던 사실 중 하나는, 'S - 21' 이라는 이름의 극비시설이었던 이곳은 본래 고등학교였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위한 교육시설들은 고문과 학대를 위한 시설로 바뀌었고, 학생들이 공부해야할 교실은 집단 수감실과 독방으로 개조되었다. 


이 곳에 수감되었던 사람의 수는 12000~20000명 사이로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온 생존자의 숫자는 단 12명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분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피해자들은 잔인한 고문 끝에 이곳 시설에 매장되거나, 대부분 '킬링필드' 라고 불리어지는 곳으로 옮겨져 집단으로 학살된 뒤, 그곳에서 버려지듯 매장되었다.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청아익 킬링필드 추모 박물관'이 바로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고 매장되었던 곳이다.




교실을 철거한 뒤, 가벽으로 부실하게 만들어진 독방들.


보다 자세히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이 글을 쓰는 입장에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을 방문한 뒤로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하나의 소개 방식'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차마 사진에 담을 수 없는, 담기 힘든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그런 장소라면 말이다. 

 




학생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잔인한 고문 도구로...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George Santayana, The Life of Reason, 1905.



"과거를 잊은 자들은 그저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조지 산타야나. <이성의 생활, 1905>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 박물관을 전부 돌아보는데 소요된 시간은 약 2시간. 킬링필드에 관한 역사와 내용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커다란 바위에 짓눌린 듯 마음이 무겁고 미어졌다. 세계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충격적이고 무기력한 순간이었다.

 




뚜얼슬랭 대학살 추모박물관을 뒤로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낮에 본 장면과 음성들이 하루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킬링필드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